남자를 말할 때 ‘호로자식’이란
☆ 仁祖때 丙子胡亂의 수난 ☆
後金은 1636년 국호를 淸으로 바꾼 후,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兄弟관계를 폐기하고
새로 君臣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했는데
조선이 거부하자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大軍에 밀린 朝鮮軍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仁祖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淸과 君臣(군신)의
義(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斥和論(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淸으로 끌려갔다.
뿐만 아니라 청군들은 철수하면서
상당히 많은 조선인들을 끌고갔다.
☆ 끌려 갔다온 還鄕女를 화냥년 이라고..☆
仁祖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온 백성들이 좋아하다
며칠 후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들어 淸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는 물론 아내를 구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仁祖는 淸에 끌려간 인원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婦女子들로서,
그 수가 무려 50만 명이나 됨으로
淸에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淸나라는 끌려간 사람들에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함으로
仁祖는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을
팔아서 그 돈으로 청나라에 가서 데려오도록 하여
상당수의 女子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女人들을 還鄕女(환향녀)라
부르면서 온 동네에서 고생하고 돌아왔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이 還鄕女들 중에는 淸나라에서 못된 性문화를
배워와 많은 남정내들과 내통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女子들이 사회 문제화되고 있으나
국가에서 묘한 방법이 없으므로 그대책을
각 가정에서 엄히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가정에서는 老人들이 밤낮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 들의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였음은 물론,
부득이 외출을 할 때도 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 쓴 후
눈만 내놓고 다니게 하고 게다가 감시자를 동행케 했다.
이때부터 오랑케에 끌려 갔다온
「還鄕女를 화냥년』이라고 하며,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 환향녀의 자식을 호로(胡虜)자식이라..☆
이들 환향녀들은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 즉
오랑케의 자식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했다.
즉, 환향녀나 호로자식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국가의 피해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왕이 평소에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전쟁에 대비도 하지 못했고.
전쟁이 나자 신하들은 왕을 홀로 두고
도망가기 바빴고..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
(12).jpg)
조선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지는 자가 없이
당시에 그들을 괄시, 멸시만 할 줄알았지 그들을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질 못한 산물들이다.
이때 환향녀들은 자신의 순결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자결을 하는가 하면
돌아온 여인들도 청군에 더렵혀진 여인이라는
주위의 손가락질과 내 쫓김에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슬픈 신세가 됐다.
인조는 환향녀가 사회적 문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됨에
홍제천 물에 몸을 씻고 도성에 들어오면
다시 정조에 대한 논란을 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렸다고 전하고 있으며,
홍제천 변의 弘恩(홍은)동은
여자들이 왕의 많은 성은을 입었다는 데서
홍은동이란 말도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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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환향녀라는 말이 맨 처음 생겨난 것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몽고의 속국이 되었을 때 고려의 여인들을 몽고에 공물로 바쳐는데, 그 후 이 여인들이 다시 고려로 돌아오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에서 환향녀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그 후 이 말이 변질되어 ‘화냥년’이란 말이 생겨났다.
2.환향녀라는 말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조선의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가서 정조를 잃고 자결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오자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란 의미로 환향녀(還鄕女) 라 부르던 데서 유래되었다. 즉 정조를 잃은 불결한 여인이라고 비하하는 의미로 “화냥년”이라고 불렀다.
3.화냥년이라는 말은 원래 “화랑년”에서 온 말이다. 화랑이란 처음에는 여자무당을 뜻했는데 후에 남자무당을 화랑이라고 했다. 여자무당인 화랑은 여러 남자들을 거느리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러남자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여자무당의 힘이 강할 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후에 사회적 지위가 약해지고 천대받게 되자 결국은 매춘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화랑년”이란 매춘여성을 가리키는 말로써 “화냥년”이 된 것이다.
역어유해에는 자유분방하게 노는 계집을 화랑(花郞) 이라 적고 있다.
4.”화냥년”은 음탕한 계집을 뜻하는 만주어 ‘hayan하얀’에서 온 말로 “하얀년”이 변해서 “화냥년”이 된 것이다.
위의 네가지 설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다만 참고하시고 이런 설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